PLAYBOY의 예술(Art Paul): 원제-The Art(Paul) of PLAYBOY
이번 시간에는 PLAYBOY지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PLAYBOY지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여성주의자들과 정치적 우익세력이 우세하던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에겐 PLAYBOY지는 반란 그 자체였다. 그러나 1953년 12월 잡지의 창간호가 나왔을 때 이것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PLAYBOY는 2차 대전 후의 도덕관과 검열기준을 우습게 만들면서 남성들의 성을 해방시켰다. 1938년에 창간된 남성 잡지인 Esquire지도 Petty와 Alberto Varga가 그린 선정적인 그림을 실기도 했었으나 세계 2차 대전 이후 그 명성이 사그러 들었던 상태였다.
Esquire지의 홍보부에서 짧은 기간 일한 경력이 있는 Hugh Hefner는 Esquire지에서의 경험으로 영감을 얻어 내용과 형태가 아주 새로운 획기적인 잡지를 만들기로 하는데 바로 이것이 문화적 혁명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저는 재즈 시대에 무척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920년대죠.”라고 Hefner는 말한다. “전 그 시대를 무척 그리워합니다.”
PLAYBOY는 중서부 중상류층에서 자라난 Hefner의 성장배경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의 청소년시절의 환상을 재현하는 창구의 역할을 했다.
“2차 대전 이후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척 위축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다시 20년대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심지어는 스커트의 길이까지도 더 길어졌습니다. PLAYBOY는 내 청소년시절의 환상을 재현하고자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Hefner는 모든 남성들이 재즈음악을 들으며 마티니를 마시며, 수입 스포츠카를 몰고, 우아하게 총각 신분을 유지할 권리가 있거나, 적어도 그런 상상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을 거부할 남성들은 없었다. 1970년대 PLAYBOY의 전성기 때는 무려 7백만부 이상이 팔려 나가기도 했다.
도대체 PLAYBOY지의 어떤 디자인적 요소-형태, 타이포그래피, 일러스트레이션-가 남성독자들에게 어필했을까? 만화가 R. Miller가 디자인했던 최초의 잡지 초안은 마치 영화잡지처럼 보였고, Hefner의 마음에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Hefner는 자신의 돈을 투자하고, 가구를 담보로 빌린 8000불까지 들여서 창간호를 준비했는데 잡지가 싸구려 같이 보이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난 잡지의 컨셉 만큼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디자인도 참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Norman Rockwell이나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주류를 이뤘으나 난 1950년대 초의 피카소나 추상미술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예술작품들을 잡지의 페이지로 옮겨 놓는 듯한 시도는 당시 매우 새로운 것이었으며 바로 그게 Arthur가 해낸 일이었습니다.”
Arthur란 바로 Art Paul이며, Hefner가 잡지의 창간호를 위해 고용했던 디자이너였다. 만약 Hefner가 이 Institute of Design 출신을 PLAYBOY의 아트디렉터로 고용하지 않았다면 PLAYBOY지는 아마도 싸구려 포르노잡지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시카고 출신인 Art Paul은 Hefner를 만나던 당시 시카고에 작은 디자인사무실을 가지고 있었고 PLAYBOY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고, PLAYBOY지가 그의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안정적인 직장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Art Paul은 Hefner의 말에 넘어가게 된다.
“Hefner는 내게 주식의 일부를 제공하겠다느니 하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설들력이 있었던 것은 바로 Hefner의 잡지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유롭고 새로운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거부할 수는 없더군요.”라고 Art Paul은 회상한다.
Paul은 프리랜서로 창간호 작업에 참여하기로 동의한다. 당시 Paul은 28세였고, Hefner는 27세였다. Paul은 Hefner의 컨셉에는 동의했으나 당시 잡지의 이름이었던 Stag Party(‘남성들만의 파티‘라는 의미)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이름을 바꿀 것을 Hefner에게 제안했다. Paul은 잡지창간 불과 몇 주전에 이런 제안을 했고, 조사결과 이미 Stag라는 잡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법적인 문제가 야기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총각의 라이프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나열해봤습니다. Playboy는 당시 쓰여지지 않았던 이름이었고 20년대를 반영하는 단어여서 마음이 들었습니다.” 라고 Hefner는 회상한다.
Hefner에게 PLAYBOY는 남성들의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에 영감을 주는 사명과도 같았으며 ‘시카고 바우하우스’라고 불리는 Institute of Design에서 Moholy-Nagy에게 배웠던 Paul에게는 현대 잡지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실험할 수 있는 연구실과도 같았다.
창간호의 마감일은 매우 빠듯했다. Paul은 이렇게 회상한다.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주입시켰습니다. ‘이건 남성잡지다. 그러니까 남성적으로 보여야 된다. 가능한 한 강하게 만들어야 된다.’ 하지만 그러기엔 제약이 많았죠. 서체도 몇 개 가진 게 없었구요.”
다행히 슬라브 세리프체인 Egyptian체가 잘 어울리는 듯 했고 로고체로도 괜찮아 보였다. 창간호의 표지는 매우 중요했다. 2가지색만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릴린 몬로의 유혹적인 흑백사진보다 더 매력적인 이미지는 없었다.(이 마릴린 몬로의 사진은 이미 인쇄물로 개재가 되었던 사진으로 Paul은 이 사진에서 마릴린 몬로만 따서 사용했다.)
표지의 헤드라인은:
First Time
in any magazine
FULL COLOR
the famous
MARYLIN MONROE
NUDE
(잡지로는 최초로 총천연색. 유명한 마릴린 몬로의 누드)
마릴린 몬로의 이 사진은 누드사진을 제작하는 John Baumgart 달력회사에서 구한 것으로 몇 백 달라 정도를 주고 구입했다. 표지의 색상제약은 문제 거리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난 잡지들이 가판대에서 어떻게 하면 눈에 띌 수 있는지 열심히 관찰했습니다. 대부분의 잡지들은 커다란 잡지 로고에 다양한 색으로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나는 단순한 흑백사진에 빨간색 로고가 들어간다면 어디서나 눈에 쉽게 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Paul은 회상한다.
플레이보이지 창간호. 1953년 12월호
50년대 말의 Henry Wolf가 디자인한 Esquire의 표지같이 Paul의 PLAYBOY표지도 단순하게 반라의 여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재밌고 익살맞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는 잡지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끼도 포함된다. Paul의 모든 표지의 컨셉은 토끼를 포함시키는 디자인으로부터 시작한다. 표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잡지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끼를 찾는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이 되었다. Hefner나 Paul도 토끼가 이렇게까지 성공적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Esquire나 The New Yorker는 각각 남성 캐릭터가 있었죠.(Esky와 Eustace Tilly) 남성 캐릭터로 동물을 사용한다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턱시도를 입은 토끼는 꽤 재밌고, 섹시하며 세련돼 보였습니다.” 라고 Hefner는 말한다. 초기에 R. Miller가 그렸던 총각 이미지에 머리만 토끼로 바꿔서 창간호에 실었다. 세 번째 호가 나올 때쯤에는 Paul이 그렸던 토끼의 옆모습이 PLAYBOY지의 공식 심볼이 되었다.
Hugh Hefner(왼쪽)와 Art Paul(오른쪽). 1950년대 초.
잡지 발행인인 Hugh Hefner는 동물을 잡지의 마스코트로 하기로 했다. Paul은 토끼 마스코트를 디자인했고 제 3호부터 모든 표지에 이 토끼 이미지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PLAYBOY 창간호가 나왔을 때 남성독자들과 10대 소년들은 잡지의 성에 관한 내용 때문에 잡지를 봤다. 그러나 Paul은 PLAYBOY를 단순한 섹스잡지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PLAYBOY를 남성용 라이프 스타일 잡지로 생각하고 Hefner는 섹스를 정상적인 생활의 일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잡지에 사용할 이미지들을 이미지 대여회사에서 빌리기 보다 직접 찍기 시작했다.
“PLAYBOY지의 누드 사진들은 실생활과 같은 환경에서 촬영하여 현실감을 한층 살려줍니다. 그리고 직업모델이 아닌 아마추어들을 사용하려고 했구요. 그것은 단순한 누드가 아닌 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정숙한 여자들도 섹스를 좋아한다. 따라서 섹스는 나쁜 게 아니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거지요.”라고 Hefner는 말한다.
Paul은 누드사진들보다는 잡지의 디자인적인 부분에 더욱 치중했으며 그 결과 탁월한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들이 잡지에 표현되었다. Paul은 원래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에 구분을 두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난 Norman Rockwell과 미켈란젤로 모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Norman Rockwell을 꼽을 겁니다. 미켈란젤로 같은 화가의 그림은 케케묵은 미술책에서나 볼 수 있지만 Norman Rockwell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새로운 잡지나 신문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학교 다닐 때 일러스트레이션은 낮은 것으로, 회화는 높은 것으로 여기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결국 한 지붕 밑에 있는 것인데 말이죠. 단지 일러스트레이션은 출판업자에게 돈을 받고 회화는 로마의 성당에서 돈을 받는다는 차이뿐인데 말입니다.”
이러한 Paul의 생각은 PLAYBOY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의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으로 Paul은 수많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화가들에게 잡지에 사용될 그림을 의뢰했다. 그 결과 PLAYBOY는 매우 절충적인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미니멀, 초현실, 팝 등이 골고루 적용되었다.
Paul의 레이아웃은 일러스트레이션이 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Paul이 PLAYBOY에서 이룩한 혁신은 die-cut나 별지 등을 이용한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다양한 형태와 모양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Paul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저 평면적인 채로 두지 않고 접지 등을 이용해서 동적인 착시현상을 일으키도록 디자인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Hefner는 언제나 기꺼이 그 디자인을 실현시키는데 돈을 투자했습니다. 이 점은 내가 그를 제대로 본 거죠.”
Paul은 그의 디자인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리드에 많은 변화를 주었고, 타이포그래피에도 많은 실험적인 디자인을 시도했다. 아마도 90년대가 실험적인 디자인들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으나 이미 60년대, 70년대에 Paul은 그러한 실험적인 디자인을 시도했고 그것이 현대 잡지디자인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Paul은 그저 포르노잡지가 될 수도 있었던 PLAYBOY지에 지적인 감각을 불어넣었습니다. 스마트하며, 때로는 날카롭고, 번뜩이는 재치가 넘치면서도 독자들의 마음을 잘 읽는 잡지로 만들었습니다.” 라고 George Lois는 말한다.(George Lois: Esquire지의 표지디자인으로 유명. 1960년대 Esquire지의 획기적인 표지디자인으로 Esquire지를 단순한 남성잡지에서 사회잡지로 전환시켰다)
Paul은 생동감과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하여 페이지에 구멍을 내거나 페이지 사이에 종이를 끼어넣는 방법을 사용했다. 1975년 스파이에 관한 기사를 위해서 페이지에 구멍을 내서 기사의 타이틀인 "암호 전쟁(The Code Battle)"을 구멍을 통해 보이게 했다. 디자이너: Len Willis.
1976년 기사 “미국, 파산 직전(America is going to broke)”에서는 첫 스프레드에 주민등록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의 내부를 보여주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신발의 바닥에 주민등록번호가 보이도록 했다. 디자이너: Tam Staebler.
두 가지 다른 의견을 담고 있는 두 가지 기사를 양쪽에 놓고 그 사이에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모양의 삽입지를 넣어 두 글의 기고가들의 각각의 주장을 분리시키는 효과를 냈다.(비둘기는 양쪽으로 넘길 수 있게 페이지사이에 삽입되었다)
“잘 먹으면서 살 빼세요.(Eat Great Loose Weight)”라는 제목의 기사. 1960년. Paul의 재치있는 타이포그래피와 이미지의 조합이 돋보인다. 글자와 이미지가 조화롭게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Orient Express)"라는 제목의 기사. 1969년. 일러스트레이션: Roy Schnackenberg. Paul은 그래픽적인 요소와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 이미지에 관대하게 지면을 할애했다.
“익살극(Slapstick)"이라는 제목의 기사. 1976년. 일러스트레이션: Brad Holland. Paul은 이와 같이 일러스트레이터들로 하여금 특이하고 눈에 띄는 인물을 창조하도록 했다.
“좋은 계란(A Good Egg)"이라는 제목의 기사. 1961년. PLAYBOY지는 단순히 섹스만을 다루는 잡지가 아님을 보여준다. Paul의 레이아웃은 지속적으로 평범한 잡지디자인의 예를 여지없이 깨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30년간 Paul이 몸담고 있던 PLAYBOY는 대규모 사업체로 성장했고 이제 잡지는 그 일부에 불과하다. 1983년 Paul은 회사를 떠났다. “사실 2, 3년 전에 이미 그만 둘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 했었죠.” Hefner는 그가 회사를 떠나겠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회사에 남아있겠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난 PLAYBOY의 TV광고가 못마땅했습니다. 심지어는 날 달래려고 Hefner는 나에게 광고를 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난 더 이상 그런 TV광고에 아무런 관심이 안 생기더군요.”
현재 Paul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전시회도 몇 번 가졌다. 이제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로 되어 버렸다. 1991년 시카고에서 열렸던 AIGA 컨퍼런스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을 때 몇몇 행사참석자들이 PLAYBOY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왜곡된 묘사나 편견 등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항의를 했었다. 그러나 Paul이 남긴 작품들은 단순히 섹시한 토끼가 전부는 아니다. 그는 예술과 문화의 벽을 허무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잡지에 있어서의 일러스트레이션의 역할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PLAYBOY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 글을 통해서 잡지 속을 들여다보게 되었네요. 여러분들이나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PLAYBOY지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사라졌길 바랍니다.^^
80년대도 아니고 이미 60, 70년대에 이런 디자인을 시도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현재 미국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아웃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을 이미 시도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군요. 현재의 Rolling Stones지가 혹시 PLAYBOY지의 디자인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생기는군요.^^
이미 거의 40년 전의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봐도 전혀 늙지 않은 듯한 디자인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타일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와 컨셉이 살아있는 디자인이라 더욱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다음 시간에 또 다른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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