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s+Design

디자인정글 연재-Paul Rand

Eunice_t-story 2008. 4. 19. 14:19
오래 전에 디자인정글에 연재했던(아마 지금도 사이트에 있을지도...) 글 중에 폴 랜드에 관해 올렸던 내용을 여기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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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계에는 Three Tenors가 있습니다. 그리고 디자인계에는 Three Designers가 있습니다. 이 디자이너들은 음악계의 Three Tenors가 음악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듯이 디자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 안타깝게 최근에 돌아가신 분, 아직 생존해 계시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분, 이렇게 세 분을 여러분에게 소개할까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에는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이 분들의 디자인 철학이나 독창적인 디자인 능력은 현대 젊은 디자이너들의 현란한 포토샵 테크닉을 무색하게 하며 유행이나 스타일추구에만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게 만들어버립니다. 
Three Designers의 첫 번째 시간으로 디자인계의 영원한 혁명가 Paul Rand를 소개합니다. 
미국의 디자인 잡지인 PRINT지 1997년 5/6월호에 Steven Heller가 쓴 글입니다.
[폴 랜드에 관하여(원제: Thoughts on Rand)]
“모더니즘은 믿음이자 종교였으며 우리가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사명이었다. 폴 랜드는 우리의 리더였으며 영감이었다."-Louis Danziger 
96년 11월, 82세로 폴 랜드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경력과 디자인 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업적들은 이미 60년간 계속되어 왔었다. 디자인을 공예에서 전문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미 1932년 그가 아직 십대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광고, 책, 잡지, 패캐지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0년대말 즈음에는 스타일과 테크닉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디자인계에 형태로만 승부를 거는 디자인을 추구하였다. 그는 러시아 구조주의와 독일의 De Stijl,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미국 상업예술계에 소개하는 중간자 역할을 감당했고, 이런 기존의 방식들을 미국적 위트, 유머와 접목시켰다. 32세의 나이에 그는 저서 Thoughts on Design을 집필했는데 이 책은 모던 디자인의 성경과 같은 책으로, 형태와 내용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다룸으로서 테크닉에 관한 책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말년에 그는 새로운 디자인계의 흐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그가 처음 디자인계에 입문했을 때처럼 평범함을 거부하며 그의 삶을 마감했다.
폴 랜드와 커네티컷의 Weston에 있는 그의 집 
폴 랜드는 처음부터 혁명적이지는 않았다. 뉴욕의 상업미술가로 성장하면서 그는 실무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기능을 무시한 장식적인 디자인을 경멸하였다. 그는 시대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디자인의 지속성에 영감을 준 Paul Klee, El Lissitzy, Le Corbusier를 존경했으며 특히 Le Corbusier가 한 말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모던이란 흘러가는 유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이다.” 
폴 랜드가 24세였던 1938년, 그는 당시 유명한 그래픽 디자인잡지였던 PM지에 의해 미국 디자인계의 주요인물로 언급되었다. 수많은 디자인계의 저명인사들 가운데서 그는 편집, 광고, 홍보물 디자인 분야에서 비대칭 레이아웃과 기발한 이미지로 독특한 그만의 디자인 영역을 구축하였다. PM지는 그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그는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에게는 일관된 스타일이 없는데 매 작품이 새로운 도전이고 각 문제의 해결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상당히 짧은 기간 내에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명성을 쌓았다.
Auto Car사의 홍보책자 레이아웃. 1942년
책표지. 1945년
Orbach사의 신문광고. 1948년
폴 랜드는 1914년 뉴욕 부룩클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저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나면서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 간판에 모델을 그려 넣기도 하며 그림 그리기를 엄격히 통제하던 집안분위기에 반항하기도 했다. 그는 George Herriaman의 만화 Krazy Kat 등을 보면서 미술적인 관심을 키워나갔으며 학창시절 교내행사때 사용할 표지판을 그리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예술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그래서 폴 랜드가 Pratt Institute에 입학하려는 것도 반대했었다. 그러나 폴 랜드가 낮에는 맨하탄에 있는 Harren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조건하에 Pratt Institute의 야간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두 학교 모두 폴 랜드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Pratt 재학시절, 그는 마티스나 피카소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교수들을 비난하였다. 그의 미술공부는 학교가 아닌 뉴욕 공립 도서관 313호실에서 미술서적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독일의 광고디자인 잡지인 Gebrausgraphik과 영국의 Communication Art를 통해서 A.M. Cassandre, Lazolo Moholy-Nagy, 그리고 바우하우스를 알게 되었다. 
1930년대 초, 폴 랜드는 지도와 광고, 신문의 글씨를 제작하는 파트타임직을 얻게 되었고 맨하탄 Art Students League의 드로잉수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이민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독일에서 온 George Grosz는 비록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나 폴 랜드는 그에게서 받은 영향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학교와 직장의 바쁜 생활에도 그는 잠재 고객들에게 보일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가 느끼기에 작품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일을 얻기 힘들거라 생각했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걸림돌이 될 거라 판단하여 그의 성을 Rosenbaum에서 Rand로 바꾸었다. 
학창시절, 그는 Sachplakat라고 알려진 독일의 정물 포스터 스타일의 광고를 그의 작품에 인용했으며 당시 세련되고 장식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던 Gustav Jensen에게 영향을 받았다. 폴 랜드의 초창기 시절 그림을 사용한 작품은 바로 Jensen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다. 폴 랜드는 Jensen에게 무료로 일을 해주겠다고까지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거절당했었다. 
결국 타이포그래퍼이자 디자이너였던 Ervin Metzl과의 만남을 통해 매디슨 가에 사무실을 갖고 있던 광고디자이너이자 패캐지 디자이너인 Joe Switzer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Switzer는 폴 랜드를 제약회사인 Squibb을 위한 광고제작과 Homel Meats의 패키지 디자인을 위해 일주일에 10불의 급여조건으로 채용했다. 
1935년, 폴 랜드는 맨하탄 38가에 아주 작은 작업실을 차리고 Glass Packer지의 편집디자인과 그 외 몇몇 광고 일을 각각 2불, 4불을 받고 디자인했다. 그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작품들은 정말 형편없었지만 그런대로 해나갔다.”
폴랜드 젊은 시절 그의 작업실에서. 1936년경
1936년 불과 21살의 나이에 폴 랜드는 Apparel Arts라는 Esquire-Coronet사에서 발간하는 남성패션잡지의 특집호의 편집을 맡게 되었다. 평범한 이미지를 생동감 있는 레이아웃으로 바꾸는 재능 덕에 그는 잡지사에 정규직으로 채용됐다. 물론 당시에 폴 랜드만의 스타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특유의 감각이 Apperel Arts의 표지디자인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트 있는 콜라쥬와 재밌게 편집된 사진들은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참신한 디자인이었다.
Apparel Arts지의 Cover 
1년 뒤, 그는 Esquire-Coronet 뉴욕 지사의 아트디렉터 자리를 제안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1년 뒤에 패션지인 Esquire지의 특집기사를 디자인하기로 한다. 
폴 랜드는 이 외에도 다양한 프리랜스 일들을 했는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데 더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디자인료는 무척 싸게 받았다. 그는 많은 광고들을 제작했는데 그중에 Playtex사의 소유주이자 laytex 제품의 발명가인 Abe Spinell 같은 괴짜 고객도 있었다. 그는 폴 랜드를 그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있는 사무실로 불러들여 그의 책상 앞에 앉히고는 그 자리에서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보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 일로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제공받고 각 광고당 5불에서 10불을 받았다.
폴랜드 젊은 시절 작품. 1937년. 당시 23세. 한 세일즈맨을 위한 판촉물 
1938년 문화잡지인 Direction의 편집장인 Marguerite Tjader Harris는 폴 랜드에게 표지디자인을 의뢰하였다. 돈을 받는 대신 그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다. 1938년에서 1941년에 제작된 폴 랜드의 Direction지 표지는 디자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폴 랜드가 제작한 첫 번째 표지에서는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공격을 상징하는 내용이었는데 체코의 지도를 둘로 잘라서 표현했다. 폴 랜드는 이 표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 표지는 내용이 있는 추상적인 디자인과 내용이 없는 추상적인 디자인의 차이점을 확연히 보여준다. 형태는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겠지만 그 방법이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았다면 그 디자인은 새들을 위한 것밖에 될 수 없다.” 
1940년 크리스마스 표지에서는 선물포장리본 모양의 선들로 표현했는데 당시 나치의 유럽점령의 생생함을 전달한다. 
폴 랜드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타이핑을 하지 않고 글씨를 직접 손으로 썼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인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디자인한 표지는 신선해 보인다. 하지만 그 표지들은 피카소나 초현실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독창성 면에서는 좀 떨어질지 모르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폴 랜드의 Direction지 표지들은 그를 혁신적인 디자이너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잡지 Direction의 표지들 
PM지에 3년동안이나 계속 폴 랜드에 관한 기사가 실렸고 이후 지금은 AD라 불리는 잡지의 2/3월호에 그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폴 랜드는 유럽의 아방가르드를 디자인에 적용시켰고 그의 CI 디자인에 대한 접근방식이 발전되어 가고 있었다. 폴 랜드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Laszolo Moholy-Nagy는 AD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이 곳 미국에 와서 놀랐던 것은 우리 유럽인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미국인들보다 더 미국적이라는 사실이다. 난 내 상상력이 너무 지나쳤었다는 사실을 이 곳에 와서야 깨달았다. 이 곳의 테크놀로지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음에도 정작 미국인들은 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고도의 문명을 창조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발명에 발명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우리 유럽인들과는 달리 그것에서 철학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나간 것은 그저 향수어린 ‘정겨운’ 전통 예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우리 유럽인들이 미국인들을 따라잡고자 노력하는 이유에 대한 기반자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상한 경험이다. 이 곳 사람들이 빅토리안 양식의 집에 살거나, 고풍스런 광고를 만드는 것을 이해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젊은 세대 중에 우리 유럽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미국의 잠재력이나 정신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미국의 디자이너 가운데 폴 랜드는 가장 훌륭하고 유능하다.(중략) 그는 화가이자, 강연가이자, 산업 디자이너이며 광고 예술가이다. 폴 랜드는 이상주의자이면서도 시인과 사업가의 언어에 통달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필요와 기능을 고려하며 디자인 문제를 철저히 분석할 능력이 있음과 동시에 상상력 또한 무한대이다.”
AD지 표지. 1941년
1941년, Esquire-Coronet사의 파트너인 William Weintraub는 회사를 떠나 광고회사를 설립하였다. 27세의 나이에 폴 랜드는 Weintraub사의 아트디렉터직을 맡게 된다. 록펠러 센터에 사무실을 가지고 시작한 Weintraub사는 당시 앵글로색슨 백인(WASP)들이 숫적으로 우세하던 광고계에 첫 번째 유대인 광고 회사였으며 Revlon, Disney Hats, El Producto cigars등과 같은 큰 광고주들을 차례로 유치하게 되었다.
El Producto의 광고 스케치. 1947년
El Producto의 패키지 디자인. 1954년
Disney Hats를 위한 광고. 1946년
1년만에 폴 랜드는 상당히 많은 직원들을 채용했으나 거의 모든 작업을 직접 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폴 랜드는 광고계에 모더니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4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의 광고는 거의 ‘디자인되었다’고 말하기조차 힘들었다. 당시 미국의 광고라는 것은 거의 인쇄소 직원들에 의해 짜여졌다고 할 수 있다. 레이아웃은 카피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카피라이터가 던져 준 러프스케치를 인쇄소 편집자가 다듬는 정도였다. 
폴 랜드는 광고의 레이아웃은 매우 지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카피라이터들의 “정말 형편없는” 러프스케치들은 찢어 버리곤 했다. 그는 참을성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때로는 무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난 다른 사람들이 날 인쇄소 직공처럼 대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Weintraub사 시절, 폴 랜드에게 영향을 받은 카피라이터는 William Berbach였는데 그는 카피라이터와 디자이너로 구성되는 오늘날의 ‘제작팀’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광고계에 혁명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William Berbach 
William Berbach의 Avis 광고. ‘제2주의’(No. 2ism: ’최고가 아니므로 더 노력한다.'-'We try harder.‘)로 광고계에 바람을 일으켰다. 폴 랜드는 Bernbach와의 첫 대면을 회상하며,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만큼이나 굉장한 발견이었다. Bernbach는 내가 만난 카피라이터 중 유일하게 메모장을 들고 회의실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레이아웃이 어떻게 되야 한다는 생각을 미리 굳히고 회의에 임하지 않았던 유일한 카피라이터였다.”라고 말했다. 
1946년 폴 랜드는 그의 에세이 “디자이너의 역할”에서 이렇게 밝혔다. 
“디자이너는 선입견을 가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일을 시작해선 안된다. 아이디어는 주관적 혹은 객관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디자인은 그런 아이디어의 산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효과적이고 솔직한 결과를 위해선 일련의 정신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중략)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디자이너는 끊임없이 분석하고, 해석해야 한다.(중략) 즉각적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새로운 테크닉을 발명하기도 하고 조합하기도 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자료를 조합해서 아이디어의 문제점을 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통합, 단순화, 제거의 작업을 거쳐야 한다. 자료를 비유과 연합의 방법으로 추상화 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하고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긴장구조를 만들기도 하고 상징의 정도를 강화할 줄도 알아야 하며 관객의 감정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폴 랜드는 디자인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디자인 철학으로서도 유명해졌다. 1946년 그는 그의 4권의 저서 중 첫 번째 저서인 Thoughts on Design을 내놓았다. 그는 책 서두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책은 광고디자인을 지배하는 특정 원칙에 따른 순서에 의해 정리되었다. 책의 이미지 샘플들은 내가 직접 관여했던 프로젝트들이다. 각 광고들이 가장 뛰어난 예들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뛰어난 작품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대신해서 설명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 이 책에는 실지 않았다.” 
그는 전혀 칼리그래피를 공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칼리그래피는 “부자연스럽고 시대에 얽매이는 듯 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필체를 서체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손으로 직접 쓴 글씨만큼 자연스러운 형태의 커뮤티케이션 수단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6년 IBM과의 디자인계약에서 폴 랜드는 미국 최고의 모던한 디자인을 확립하였다. 원로 디자이너인 Louis Danziger는 이렇게 말했다. 
“디자인이 비즈니스의 효과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당시에 그 혼자만이 알고 있었다. 50년대와 60년대에 활동했던 디자이너들은 폴 랜드에게 신세를 진 거나 다름없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50년대 말부터 그가 죽기 전까지, 그는 그가 디자인한 로고로 알려졌는데 IBM, UPS, ABC, Westinghouse, NeXT 등이 있다.
폴 랜드가 디자인한 로고들. 50년대, 60년대에 만들어졌던 이 로고들 중에는 지금도 사용되어 우리 눈에 익은 로고들이 보인다.
Cummins사(1976년)와 IBM사(1958년)의 에뉴얼 리포트
그는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값진 유산을 남기고 갔다. 말년에 Paul Rand: A Designer's Art(1985), Design Form and Chaos(1994), From Laszcaux to Brooklyn(1996)이라는 중요한 세 권의 책을 썼다.
Minute Man National Park를 위한 포스터. 1974년
평화를 주제로 한 포스터. 1968년 
그가 디자인계에 일으킨 개혁을 통해서 그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을 변화시켰다. 디자인계의 심한 기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함없이 그의 사명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96년 11월 뉴욕의 예술대학인 Cooper Union에서 있었던 세미나에서 어떤 관객이 그에게 모더니즘이 죽었는지를 물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난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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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서 참 숙연해지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폴 랜드도 처음에는 힘들게 디자이너 생활을 해나갔다는 것... 그리고 한가지 부러운 점은 돈 대신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고 일했던 Direction지와의 관계... 과연 실무디자이너들이 이런 행운을 얻을 기회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아는 폴 랜드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모던’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Modern은 Contemporary(동시대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모던이란 흘러가는 유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이다.”-Le Corbusier 
폴 랜드는 그가 추구하던 Timeless design(시대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디자인. 이것이 곧 지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디자인, 즉, ‘모던’이 아닐까요...)을 하다가 간 정말 디자인사에 길이 남을 인물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도 무척 존경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이 글을 쓴 Steven Heller는 제가 다녔던 School of Visual Arts의 Design 대학원 학장님이십니다. 학장님은 학생들에게 본인이 직접 폴 랜드 생전에 인터뷰한 내용이나 직접 쓰고 조사한 내용을 소개하는 Paul Rand Seminar라는 수업을 직접 진행하셨는데 당시 학생이었던 저는 수업시간에 졸기만 했던 거 같네요...ㅡ.ㅡ 
이 글을 통해 저도 폴 랜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다음 강좌에서 뵙겠습니다.